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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 : 이번에도 정지당하면 글 안 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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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casting 2024. 3. 1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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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 지 워낙 오래되었고 (1997년 7월 일본 첫 개봉), 그 특유의 난해함 때문에 더욱 유명한 문제의 작품이 드디어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무려 27년만의 일이다.  그 때문에 이 작품은 세월의 변화를 보여주듯, 저장매체 별로 불법 해적판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비디오테이프였고, 다음에는 비디오 CD, 그리고 DVD, 나중에는 초고속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아예 동영상 파일째로(dat, mpeg, avi, asf, wmv, RM, mov, divx, xvid, vob, mp4, mkv) 웹하드와 토렌트를 돌아다닌 지 오래다. 아니,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용산전자상가도 에바열풍 확산에 한 몫 했다 : 좋든 나쁘든 간에

 

 

그런 이유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하 EOE)의 개봉 소식은 일종의 사건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볼 사람들은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영상물을, 27년이나 지난 지금에서 와서 정식 상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에바라는 브랜드 파워에 대한 자신감인지, 아니면 국내 수입사와 원저작권자 사이에 극장 개봉을 전제로 한 어떤 계약 조건 같은 게 있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EOE 하나만 놓고 보자면 국내 극장 상영은 처음인 게 맞으니까 덕후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기는 하다. 

 

 

글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에 앞서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이 있는데, EOE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파헤쳐서 영화 속 온갖 은유와 상징, 감독의 의도 등을 논문 수준으로 펼쳐낸 글들을 양산한 작품이다.  더군다나 나 역시 그런 글들을 읽어 본 입장이기에, 내가 EOE를 다시 보고 적게 될 감상이 과연 나 자신이 오롯이 느낀 감상이 맞냐고 묻는다면 바로 대답하기가 어렵다.  타인의 의견이 내 머릿 속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세월의 여파로 내 의견처럼 둔갑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최대한 조심하며 글을 써 볼까 한다.  덤으로 내가 에바를 알게 된 계기도 곁들여서.

 

 

대개봉이라고 해놓고 심야위주로 상영해서 포기할 뻔 했다

 

 

* 관람일 : 2024년 1월 28일 (일)  1회  (09:45 ~ 11:22) 

* 극장 : 메가박스 화곡점 2관 (2D,자막)

* 티켓가격 : 9,000원 (정가 11,000원 / 11번가 메가박스 모바일 티켓 1매 사용 = 9,000원)

* 런닝타임 : 87분 (1시간 27분)

 

 

- 관람 전 극장 이야기 잠깐

 

 

개봉 자체는 1월 17일에 메가박스 단독으로 했지만, 여기저기 다 뒤져봐도 다들 오후 늦게 아니면 심야 타임 상영이길래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메가박스 화곡점이 서울에서 유일하게 일요일 오전 상영을 하길래 보러 갔다.  하긴, 에반게리온에 열광하던 세대들 연령대가 좀 많이 높아져서, 평일에는 야간 아니면 볼 시간이 없긴 하다.

 

 

메가박스 화곡점 : 존재감이 약해서 처음 본 사람은 모르고 지나친다

 

사실 서울 강서구에는 1990년대에 지금의 강서구청 사거리 지점, 정확히는 스타벅스 강서구청사거리점에서 그 우측으로 이어지는 귀뚜라미 홈시스텔 건물 자리(강서 아이파크 맞은편)에 상영관 3개 규모의 「뉴시네마 (New Cinema)」극장이 있었는데, 그 곳이 없어지고 나서는 김포공항 CGV가 그 명맥을 이어가다가 지금은 롯데가 그 쪽에 진출하면서 CGV가 철수하고 롯데몰과 롯데시네마 김포공항점을 개장한 이후 극장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저 사진 속의 화곡역 메가박스와 롯데시네마 김포공항 / 가양점, 그리고 CGV 등촌점이 예전의 강서구 극장 시장을 지배하고 있고, 마곡 쪽에 생긴 메가박스는 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리암 니슨은 참지 않긔 : 아니, 이제 좀 참으세요 쉰들러씨.

 

마침 동시 상영작으로 리암 니슨의 레트리뷰션이 걸려 있었는데, 일요일 오전 9시라 그런지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리암 니슨은 영화 미션(1986)의 존 신부님 이미지로 굳어져 있어서, A 특공대를 거쳐 테이큰 시리즈로 복수의 대명사가 된 걸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특히 트랜스포터(2002) 3부작을 통해 액션 아이콘으로 등극하여 계속 급이 높아진 제이슨 스타뎀과는 대조적으로, 리암 니슨은 반복되는 이미지 소모로 인해 점점 극장용 영화가 아닌, 킬링타임용 B급 액션배우로 추락하고 있어서 더 안타깝다.  

 

 

아니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JPG

 

그런 리암 니슨을 뒤로 하고, 간식으로 선택한 메가박스제 갈릭마요 포테이토.  양은 얼마 안되면서 7천원이나 한다.  그 옆의 코카콜라 라지(L)사이즈는 3,500원.  합치면 10,500원인데, 이러니 극장이 먹는걸로 남긴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아, 팝콘 말고 저거 고른 이유가 있다.  EOE 보기 며칠 전, 외계+인 1,2부 연속상영회에서 4시간 동안 팝콘 먹다가 질려버려서 그렇다.  어쨌거나 저 갈릭마요 자체는 먹을 만 하다.  대신 양에 비해서 비싸다는 점과, 저 컵이 객석 컵홀더에 들어가지 않아서 손에 들고 먹어야 하는 불편함, 마지막으로 토핑 마요네즈 때문에 깔끔하게 먹기가 힘들다는 쓰리 콤보를 감내해야 된다는 게 문제지만. (냅킨 필수)

 

 

 

- 감상 및 잡설 시작

 

 

dricas.net 주소는 원래 세가 소유였다

 

에반게리온 TV판과 구 극장판 EOE 모두 일본 게임회사 세가(SEGA)가 스폰서로 참여했다.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이 부분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이 블로그의 도메인인 dricas.net 이 원래 세가가 사용하던 주소였기 때문이다.  세가가 드림캐스트를 끝으로 가정용게임기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드림캐스트닷컴을 제외한 나머지 관련 도메인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해버렸고, 그 때 한 번 선점해서 사이트를 4년 정도 운영하다가, 나 역시 지난 10여년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 사이 도메인 전문 사냥꾼들의 손에 넘어갔던 것을 5년간 지켜보던 끝에 다시 내 걸로 만들고 오픈한 게 이 블로그다.  덕분에(?) 일본쪽 게임 오타쿠들에게 한글이 난무하는 위험한 지뢰사이트로 알려지기도 했었다. OTL  

 

 

한글이면 한글이지 한글어는 또 뭐래.JPG

 

 

참고로 세가가 스폰서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2022년에 애니메이션으로 나왔던 만화 이세계 삼촌(異世界おじさん)에도 개그 요소로 언급되는데, 스토리 진행과는 별개로 세가와 세가의 게임 / 게임기를 찬양하는 내용이 절반이라서 타겟으로 삼은 독자층이 너무나도 명확한 작품이다.  본인이 세가 팬이 아니라면, 그런게 있구나 정도로 알고 넘어가시는 게 편하다.

 

 

예전엔 몰랐는데 신지 너 다리비율이 괴물이구나.JPG

 

EOE는 다시 봐도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임팩트 그 자체다.  영화 오프닝부터 읊뿔꺏쩗하는 남자 중학생 주인공을 보여주는 과감함은 대형 스크린으로 보면 더 쇼킹하다.  누구 말마따나 일본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애니메이션이다.  아, 이런 쪽에서 비슷한 컬쳐쇼크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하나 더 있긴 하다.  불란서.  어째서 프랑스냐고?  궁금하신 분들께는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바타이유의 1928년 소설, '눈 이야기(Histoire de L'oeil)'를 추천드린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영상화가 안 될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작품이다.  역시, 일본 같은 성진국에 대적하려면 우리나라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시절에 저런 소설을 출간했던 프랑스야말로 딱 맞는 라이벌이 아닐까.

 

 

해킹까지 가능한 팔방미인 키사라기 미사토

 

애초에 EOE는 TV판의 내용이 이어지는 작품이라서, 혹시 이걸로 에반게리온(이하 에바) 첫 테이프를 끊으려는 분이 계신다면 말리고 싶다.  줄거리를 아는 사람도 정신줄을 놓게 만드는 마당에, 감독이 작정하고 스토리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극장판을 먼저 봤다가는 더마블스로 마블 시리즈에 입문한 누구처럼 될 가능성이 무지 높다.  그러니까 처음인 분들은 부디 TV판부터 보신 다음 첫 극장판인 데스 & 리버스(총집편)를 거쳐서 마지막 편인 EOE를 관람하시길 추천한다.  (※ 신극장판은 이걸 다 본 다음 보셔야 한다)  모르고 봤다가는 초반부터 아스카가 왜 혼수상태인지, 네르프는 뭔데 개점 휴업상태로 시작하는지 알 길이 없어서 어리둥절 하다가 비주얼 쇼크 끝에 라스트 씬에서 육두문자를 연발하게 된다. (※ 실제 지인의 사례)

 

 

세컨드 임팩트의 진실 : 안노 히데아키 감독 덕질기록

 

그리고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저런 은유와 상징으로 짜장 범벅을 만들어놓은 EOE도 잠깐 숨 돌릴 구석이 있다.  바로 위에서 미사토가 네르프 본부의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하는 장면에 나오는 이스터에그인데, 이 때 미사토는 분명히 저 화면을 보면서 "이게 세컨드 임팩트의 진실이란 말이지..."라고 중얼댄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컴퓨터 화면 속 영어 내용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 학창시절과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낙스 설립 이후 만들었던 작품들 이력을 EOE속 내용과 중간 중간 섞어 만든 포트폴리오 소개다.  확대해서 보면 '톱을 노려라',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같은 작품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 양덕들이 이거 보고 많이 뿜었다)

 

 

안노 감독 본인도 최애는 아스카라고 한다.JPG

 

개인적으로 EOE가 작품 외적으로 이룩한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면, 작중에서 아스카가 양산형 에바시리즈와 대결할 때 배경음악으로 깔렸던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바흐 관현악 모음곡 3번 BWV 1068, 2악장 'Air')」를 덕후들에게 널리 알렸다는 점을 꼽는다.  덕후들의 특징 중 하나가 관심분야 외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인데, EOE는 그런 이들에게 '클래식도 좀 듣고 살아 이것들아!'라고 야단치는 느낌이다.  EOE 이전 극장판 '데스 & 리버스'에서 파헬벨의 캐논을 삽입곡으로 썼던 이력을 감안하면 다분히 고의적이다. 더군다나 EOE의 1,2부 구성 중 1부 에피소드 제목 또한 'Air'다.  그런 의미에서 실제 장면 유튜브 영상 하나 추가.

 

 

미사토 동인지 열풍을 일으킨 그 장면.JPG

 

방금 이야기한 아스카 전투씬도 그렇지만, 미사토와 신지 키스 장면 역시 대형 화면으로 보니까 확실히 임팩트가 달랐다.  만약 EOE를 처음부터 극장에서 접했다면, 그 여파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엄청났으리라 확신이 들 만큼.  일단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뭐 하나 예상대로 가는 것도 없을 뿐더러, 주요 등장 인물들이 PTSD 기본 장착에 옵션으로 특정 대상 결핍증까지 있어서 모든 행동이 극단적이다.  이 와중에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마저 하필 죽느냐 사느냐다.  보면 볼수록 엔드라는 단어가 제목에 정말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위의 장면을 보는 순간 다른 게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빵 터졌다.  내 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어땠으려나.  

 

彩画堂 : 여기까지

 

 

- 에바와의 인연 (쉬어가는 글)

 

 

4인조 남녀 혼성그룹 코리아나(KOREANA)의 노래 '손에 손잡고 (Hand in Hand)'가 88 서울올림픽 주제가로 선정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울려퍼지던 먼 옛날,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1988)」라는 미국발 도서 한권이 서점가를 강타한 적이 있었다.  제목 그대로,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것의 확장판이다는 내용이었는데, 이걸 내 경우에 대입한다고 하면 제목만 조금 바꿔도 될 것 같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덕질은 군대에서 배웠다'로.

 

 

군 시절, 허허벌판 도로 옆 논두렁에 세워진 검문소에 파견 나갔을 때 만났던 고참 A씨.  이 양반은 당시 미술대학 휴학중이었고, 상식인이었다는 점에서 좋은 고참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 양반이 덕후였다는거다.  검문소 지하벙커 내무반에 놓여있던 금성(현 LG전자) 비디오비전을 이유 삼아 외박이나 휴가 나갈 때, 왕고이자 내무반장이었던 그는 근처 비디오가게에 가서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빌려올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마침 야간근무를 마치고 들어와서 휴게시간이었던 내가 그 심부름에 당첨이 되었고, 운명의 시계추는 이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워커 광내는 작업도 열외시켜 가며 외출을 보내주는 그 배려에 감동했던 것도 잠시, A씨는 그 시기까지만 해도 덕질 자체가 뭔지도 모르는 일반인이었던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였다.  

 

- A : 니 에반게리온이라고 들어봤나?

- 나 :잘 못 들었습니다!

- A : 새끼, 잘 못 듣긴.  만화 이름이다. 됐나?

- 나 : 에반게리온... 말씀이십니까?

- A : 응.  한 두개씩 빌려온나.

 

그렇게 해서 빌려온 대원동화판 에바 TV시리즈 비디오테이프를 A씨에게 넘기고 취침하려는 찰나, 현존하는 모든 공포영화의 그것을 가볍게 능가하는 사운드 이펙트가 내 귓가를 강타했다.

 

  "니 지금 자나?"

 

IC 무섭게 왜 그러는건데.JPG

 

 

- 나 : 아닙니다!!!

-  A : 그라믄 잘 됐네.  내하고 이거 보자.

- 나 :....예 알겠습니다!!!

-  A :  와, 싫나?

- 나 : 아닙니다!!!! 좋습니다!!!!!

-  A  : 풉 ㅋㅋㅋ  내 좋은건 같이 보는 사람이다 안카나.  와라.

- 나 : 예 알겠습니다아아아!!!!!!!

 

막내에서 겨우 벗어났던 당시 내 입장에서, 견장 달고 있는 양반이 징징거리는데 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억지로 난생 처음 에반게리온 TV판을 보게 되었건만, 불행히도 내 시련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 A  : 소년이여~~  신화가 되라~~~♬ 

- 나 : ....................

- A  : 와?  닌 재미없나?  

- 나 : (순간 당황했다) ...네?

- A : 네?  네라 켔나?  

- 나 : 시정하겠습니다!!!!

- A : 됐다.  니 앞으로 노래 나오면 따라 불러라.

- 나 : 예 알겠습니다.

- A : 목소리 그으 뭐꼬?  확 다 집합시켜...

- 나 : 예 알겠습니다아!!!!!!

- A :  고마 됐꼬, 따라 불러봐라.

- 나 : 푸른 하늘을 그리며 꿈을 꾸네에~~~~♪

- A :  잘 하네!! 더! 더!!!!

- 나 :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아아아아 ~~~~~~~~~~~~~!!!!

 

 

https://youtu.be/ciUQc_7qR5o

나는 이걸 직접 부르고 다녔다ㅋㅋㅋ.youtube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어야 할 터인데, 왜 나는 매 에피소드마다 주제가를 따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서 아침 구보할 때도, 같이 야간 근무 설 때도, - 그것도 도로 한복판에서 - A씨의 "전방에 힘찬 노래 발사!!" 구령만 나왔다 하면 자동으로 이 잔혹한 전사의 테제를 불러야만 했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변증법적 관점에서 2천자 이내로 서술하시오...같은 논술 문제는 나오지 않으니까 걱정 마시고, 나중에 A씨가 견장 떼고 쭈구리가 되어 관물당하던 날이 되어서야 나는 겨우 저 노래에서 해방되었다.  TV판 비디오를 전부 시청하고도 5개월이 더 지났을 무렵의 일로, 그가 제대 하던 날은 여러모로 내겐 경사였고 동시에 실로 잊지 못할 6개월이었다.

 

다행히도 그 때의 나는 내무반을 챙기는 중간 기수가 된 덕분에 웬만한 고참들도 더이상 내게 저 노래를 강요하는 일은 없었다.  내 위로는 더 이상 남은 덕후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잠깐이나마 멈춰있던 운명의 시계추는 A씨가 제대하고도 2달 넘게 흘렀을 때, 갑자기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도중, 옆 소변기에 와서 일 보던 후임이 내게 했던 한마디가 발단이었다. "어? 그거 예전에 A하고 같이 보시던 만화 노래 아닙니까?"

 

어우 야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고 있어.JPG

 

뭐?

 

내가 그 노래를 이젠 스스로 부르고 있다고?

 

후임병의 기습적인 팩트폭행에 좌절한 그 날 이후 한동안 에바 주제가가 내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게끔, 인기가요 카세트 테이프를 사와서 틈나는대로 듣고 가사를 따라 부르며 진짜로 노력했다.  오죽하면 윗 사람들에게 '전국노래자랑이라도 나가냐'는 농담까지 들었겠는가.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어느새 나도 견장 다는 날이 찾아왔다.  드디어 에바 주제가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탈출하는가 싶었는데...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마따나, 내 아래 차기수 두명이 검문소로 배치되면서 운명의 시계추는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라 360도 고속 회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왜냐, 후임 두놈이 전입 신고를 하면서 내려놨던 더블백 속에는 들어있어선 안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에바 TV판만 보고 노래만 허구한 날 불러댄 것 빼면 여전히 일반인이었던 내게, 그 인간들이 보여준 건 정체 불명의 플라스틱 박스 2개였다.

 

- 나 : 야, 이게 뭐냐?  뭘 가져온거야?

- 후1 : 아 모르셨습니까.  이런 안타까울 데가.

- 나 : 뭐?  뭐가 니 기준에서 안타까운건데? 

- 후2 : 제가 좋은거 알려드릴거지 말입니다 ㅋㅋㅋㅋ

- 나 : 좋고 나쁘고는 내가 판단할 일이고.  그래서 이게 뭔데?

- 후2 : 이게 세가 새턴이고, 옆에꺼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입니다!!!!

- 나 :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 후1 : 하... 쫌만 기다려 보십시오. 제가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 후2 : 이게 그 요즘 막 유행하는 비디오게임기입니다!

- 나 : 그냥도 아니고 막?..... 게임기...?

- 후1 & 후2 : (엄청나게 뿌듯한 표정이라 잊을 수가 없다)  예 그렇습니다!!!

- 나 : 니들 미쳤구나?

 

 

충격과 공포다 이 쌍쌍바들아.GIF

 

 

윗놈이 없어져서 안심했더니만 아래에 더 위험한 게 있었어......

 

 

 

역시 군대는 가면 안될 곳이야.JPG

 

 

 

 

- 다시 감상과 잡설로 (2)

 

 

A씨 당신이 극찬했던 컷터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이왕 군대 이야기 나온 김에 좀 더 말하자면, A씨는 아스카의 2호기 무기인 저 프로그래시브 나이프를 그렇게 좋아했다.  그 양반 표현을 빌리자면 「컷터랑 X나게 똑같이 생겨서」 그렇단다.  나도 TV판에서 처음 저걸 봤을 때 컷터가 떠올라 피식거렸는데, 막상 A씨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저 컷터날 한 칸씩 부러질 때마다 작게 조각 나는 장면이 말도 못하게 리얼해서, 저거 보는 바람에 자신이 군대 오기 전 4B 연필 깎다가 칼날이 부러지면서 다칠 뻔 했던 기억까지 떠오른다며 무용담 수준으로 줄줄 읊어대던 모습이 떠오른다.  다른건 몰라도,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저런 정밀묘사는 저도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A씨.   사랑 컷터, 기억하고 있습니까?  (풉ㅋ)

 

 

다시봐도 참 험하게 구르는 아스카.JPG

 

이제는 EOE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전 세계 덕후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신지의 아스카 목 마사지 씬을 볼 때마다, 나는 이걸 A씨와 함께 보지 않아서 실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양반이랑 이걸 봤다가는 꽤 높은 확률로 신지의 행동에 빡쳐서 옆에 있는 내 모가지를 똑같이 붙들고 흔들었을 게 분명하니까.  그러고보면 EOE 속 아스카는 신지의 이중적인 태도에 열받은 사람들의 행동심리를 그대로 투영한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걸 알고서 머리 뚜껑 열린 신지는 그런 관객들의 목을 역으로 조르는... 아니, 이건 너무 나갔다.  이 쯤에서 스톱.

 

 

대형 스크린으로 보면 확실히 위압적이다.JPG

 

이 장면을 극장 대형 스크린에서 직접 봤다는 것, 그 사실 만으로도 EOE 티켓값은 다 치룬 느낌이다.  보다 오타쿠 적으로 표현하자면, 내 만족도와 지갑 사이에서 가장 적절한 수준의 등가교환을 이뤄낸 씬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런 면에서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관람하는 걸 넘어서서, 체험을 하게 해주는 공간이라는 이동진 평론가의 의견에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나저나 저 씬에 이름을 붙인다면 뭐라고 하는게 좋을까.  초대형 레이 날개 쫘악 씬?  (.....)  네이밍 센스 좋은 다른 덕후가 해 주겠지 그런 건.  좀 뜬금 없는 말이긴 한데, 나는 집단 지성의 힘을 믿는다. 

 

 

가짜 리츠코가 마야 노트북에 타이핑한 문장.JPG

 

에바 TV판의 주제가 「난 여기 있어도 돼!」라면, EOE의 주제는 리츠코 모습으로 변신한 릴리스가 네르프 오퍼레이터 마야의 노트북에 타이핑 했던 저 문장, 「난 당신이 필요해 (I NEED YOU)」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이 온전하게 나로서 존재하려면, 그런 나를 같은 인류이자 다른 외형과 특징을 가진 개인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해주는 비교대상인 제3자가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 제3자는 내 눈 앞에 있는 당신(YOU)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서로 다른 두명의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우리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좋아해서, 사랑해서, 동경해서, 존경해서, 고마워서 필요한 것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당신이 있어야만 나도 하나의 독립된 인격이자 개체로서 인정받을 수 있기에 일단 하나가 아닌, 최소 2명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의 I NEED YOU라는 거다.  그게 안된다면 로빈슨 크루소나 캐스트 어웨이 되는거고..

 

 

인류 몰살 엔딩.JPG

 

티켓 값 다 치룬 느낌이 드는 장면 두번째.  역시 큰 화면으로 보니까 더 정신 나갈 것 같은 씬이다.  언뜻 봐도 피 분수이고, 알고 보면 인류가 싸그리 죽어서 하나가 되는 리얼 위아더월드 과정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저 때 나오는 사람들 비명소리가 진짜로 장난이 아니다.  컴퓨터나 TV 스피커로 들었을 때는 삽입곡인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가 다른 사운드를 뭉개버리기 때문에 마치 축제에서 사람들이 지르는 환호성처럼 들리는 느낌이 좀 있는데, 음 분리가 제대로 되는 극장 사운드 시스템으로 들어보면 진짜 피를 토하는 듯한 비명소리 잔치다.  일반 2D 상영관인데도 소름이 돋을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참고링크)

 

 

갑작스런 실사영상 화면 : 이제는 이거 보면 EOE보다 FLCL가 먼저 떠오른다.

 

EOE의 특징 중 하나인, 난데없는 실사 영상 등장씬에 참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쏟아냈었다.  이건 이래서 넣은거다 / 아니다 이런 이유다 / 전부 아니다 제작비 절감차원이다 등등...  개인적으로는 3번 의견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데, 실제로 저런 풍경을 정밀묘사 하는 것 보다는 저렇게 그냥 카메라로 찍어버리는 편이 더 싸게 먹히는데다, 안노 감독이 실사 영화에 손을 못 대서 안달난 사람이기도 하고, 감독 본인이 도시 특유의 쇠냄새 나는 풍경들 - 지나가는 지하철 / 전력선용 철탑 등등 - 을 유독 좋아하는 관계로 내용 환기 차원 목적도 겸해서 넣은 것 같지만.  (※ 저런 도시 속 풍경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원래 이런건 만든 사람 본인도 즉흥적인 감각으로  '야 이거 좋다!' 하고 넣었을 경우가 의외로 많아서 이런 추측 자체가 헛수고일 가능성도 무시 할 수 없다.  

 

 

뒷감당이 불가능한 엔딩.JPG

 

그나저나 다시 봐도 참 난감한 결말이다.  달랑 둘 밖에 남지 않은 최악의 상황에서 한명은 여전히 멘탈이 수습되지 않고 있고, 다른 한명은 거의 죽어가고 있는데 목까지 졸려서 기분이 더럽기 그지 없다.   간혹 둘만 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성경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이브)에 빗대는 의견들이 있는데, 아스카 부상이 심각해서 제대로 된 의료시설과 관계자가 없는 상황에선 블루라군(1980)처럼 '둘이 눈 맞아서 애 낳고 잘 구출되었답니다' 엔딩은 희망사항일 뿐, 일말의 가능성 조차 없다.  저게 어딜봐서 사람 살 곳이냐 이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긴 글렀다 이 말이요.JPG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봐도 둘 중에 누가 먼저 죽나 시합하는 중이며, 부정적으로 바라 볼 경우 예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  이렇게 답이 없는 밸런스 게임은 출제자가 욕 먹을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냥 욕하라고 만든 엔딩 같다.  전진은 애초부터 가로막혀있고, 남아있는 후진과 정지 중에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아무리 봐도 우린 다 끝났어 엔딩이다.  더이상의 논의 자체를 모조리 불허하는, 이보다 완벽한 결말이 또 어디 있을까.  진짜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고, 그래서 또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다.  여기서 신극장판 이야기는 하지 말자.  더 쓸 내용도 없는 판국에 그랬다간 감당 못한다.  그러니까 이 질문으로 EOE 감상문은 완전히 끝을 내도록 하겠다.

 

                     

안노 감독님.  적어도 이 때는 에바에 완전히 질렸던 거 맞죠?

                      

 

 

- 평가 : ★★★★☆ (별 4개)

** 전설의 레전드(!)가 귀환했다.

** 제목과 내용의 완벽한 일치

** 대형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인류몰살엔딩

** 덕후가 덕질에 질렸을 때만 나올 수 있는 드문 작품

** 아스카! 아스카! 아스카! 아스카! 

 

 

 

※ 손목시계 지수 (2024.03.14 업데이트)

런닝타임을 분으로 환산한 다음, 관람시간 동안 손목시계로 현재 시각을 확인한 회수를 나눠서 그 영화가 얼마나 지루하고 몰입도가 떨어지는 가를 나타내는 나만의 주관적 지수.  결과값이 클수록 몰입감이 대단한 작품. 단, 예외는 손목시계를 본 회수 자체가 0회와 1회일 경우. 이 때는 따로 계산하지 않고 몰입도 100%로 표기.

 

- 엔드오브에반게리온 시계지수 : 87분 ÷ 2회 = 43.5 = 반올림 44  (몰입도 44%)

 

 

- 남들에게 추천 가능 여부 :  보류 (추천/보류/비추천)

** 이미 상영 종료작이라 극장에서 볼 수 없다.

** 초보자에겐 너무 높은 진입장벽 

** 애들을 내세워서 어른을 까는 클리셰는 여전하다

** 써드 임팩트는 사실 비주얼 쇼크 임팩트일 뿐

** 이미 볼 사람은 다 보지 않았나?

**  A씨, 이런거 알려줘서 눈물나게 고맙수다. OTL

 

하지만 감독님은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신극장판이(이하생략).JPG

 

 

 

* EOE가 주는 교훈 : 제대로 된 가정교육의 부재, 지구가 멸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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